희귀질환을 이야기할 때, 당사자인 환자 이야기는 많지만 환자 곁에서 함께하는 보호자 이야기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이 환자의 가족을 대할 때 실수도 하고, 또 보호자끼리 허심탄회하게 고충을 나누기도 힘들죠. 그런데 여기 보호자의 시선에서 희귀질환 환자인 아버지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담아내는 작가님이 계십니다.
오랜 투병 생활에도 가족에 대한 사랑과 강인한 마음을 잃지 않으시는 아버지와, 그 곁에서 함께하는 가족의 일상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데요. 겨울의 끝자락을 지나고 있는 2월의 어느 날, 레어노트 팀은 귀여운 캐릭터 파우치를 한 손에 든 채 환한 미소를 머금은 박은선 작가님(필명: 긍씨)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버지와 루게릭병
아버님께 처음 증상이 나타난 시기와 확진 시기가 궁금합니다.
아버지는 점진적으로 병이 진행된 경우라,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을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운데요.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는 2014년 정도였어요. 처음에는 몸의 중심을 못 잡거나 말이 조금 어눌해지셨는데, 풍이 온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병원에서 이것저것 검사를 해도 뚜렷한 병명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증상이 진행되는 것만 지켜보다가 최종적으로 루게릭병 확진을 받은 건 2017년 겨울 즈음이었어요.
진단 방랑을 3년 정도 겪으셨네요.
네. 최종 진단을 받기까지 전국에 있는 대학병원이란 대학병원은 거의 다 가본 것 같아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사도 정말 많이 받았어요. MRI도 찍고 CT도 찍고 혈액 검사도 하고요. 그런데도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의사 선생님들도 원인을 알 수가 없다는 말만 반복하셨죠. 아버지는 다른 루게릭병 환자에 비해 진행이 더딘 편이라 진단도 오래 걸렸던 것 같기도 해요.
만약 병원을 한 군데로 정해 놓고 같은 곳에서 쭉 진료를 받았다면 판정이 빨라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긴 해요. 여러 대학병원을 전전하다 보니 주치의 선생님이 따로 없었거든요. 또 대학병원 특성상 확진이 되어야 진료를 이어갈 수 있어서, 눈에 띄는 증상이 발현될 때까지는 이 병원 저 병원을 갈 수밖에 없었어요. 루게릭병 확진보다 장애인 등록을 더 먼저 받았죠.
장애인 등록 과정은 힘들지 않으셨나요?
확진이 시간과의 싸움이었다면 장애인 등록은 다른 의미로 힘들었어요. 공단에서 현장 심사를 보러 나오기도 하고 필요한 서류도 많다 보니 부모님은 그 과정에서 더 스트레스를 받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장애인 등록 절차가 복잡한가 봐요.
네. 공단에서 현장 조사를 나오는데, 날짜는 무작위로 통보받아요. 직원이 와서 몇 시간씩 상주하는 건 아니지만, 거동이나 여러 조건을 보고 이 사람이 현재 장애인으로 등록될 정도로 생활하기 불편한지 심사해요. 여러 차례 현장 심사를 하고, 추가로 서류 검토까지 마친 뒤에야 최종 등록이 됐어요.
환자마다 상황은 다르겠지만, 저희는 신청부터 등록까지 2~3달 정도 걸렸던 걸로 기억해요.
유전자 검사는 받으신 적이 있나요?
저희 가족은 따로 유전자 검사를 진행하진 않았어요. 가족력이 없고 의사 선생님도 루게릭병은 유전형이 많지 않아 산발형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셨거든요. 또 다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까 현실적으로 검사를 받기 어려웠고요.
- Editor's Note
- 루게릭병은 발병 원인에 따라 크게 산발형과 유전형으로 나뉘어요. 루게릭병 환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발형은 가족력이 없더라도 발병하고, 신체 대사나 다른 환경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추정돼요. 유전형은 전체 루게릭병의 5~10%로 드물며, 특정 원인 유전자 변이가 원인이에요.
임상시험에 참여하신 적은 있나요?
아뇨. 루게릭병 임상시험이 많지 않기도 하고, 임상시험을 하려면 일단 이동이 필요한데 루게릭병 환자에게는 어려운 일이라서요. 정보도 부족하고 환경적 제약이 크다 보니 임상시험에 참여할 생각은 전혀 못 했던 것 같아요.
한 달에 한 번 라디컷 치료를 받는 방법도 있지만 완치가 아니라 증상을 늦추는 치료고, 따로 보험이 없으면 1회에 거의 130만 원 정도라 비싸요. 그래서 지금은 대학병원에서 영양제를 맞거나 근육이 굳는 것을 방지하는 근이완제 같은 약물을 처방받고 계세요.
완치할 수 있는 치료제가 없다는 건 저희도 알기 때문에, 증상이 조금이라도 더뎌지기만을 바라는 마음뿐이죠.
아버지 이야기를 그리고, 쓰다
연재하신 지도 어느새 2년이 훌쩍 지났는데요. 아버지 이야기를 그리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2020년에 부모님께서 귀촌하시고 제가 독립하면서,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어요.
이 시기를 어떻게 이겨낼지 고민하던 중에 주변에서 전공을 살려 만화를 그리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했죠. 당시 인스타그램에서 인스타툰이 조금씩 흥하는 시기이기도 했고요. 한 편에 10컷 정도의 분량이라 부담 없이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소재를 찾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아버지의 투병 생활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감정이나 경험이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는 게 아쉽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걸 만화로 차곡차곡 남겨 두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다시 꺼내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아픈 부모님 이야기를 안 볼 거라고 생각했어요. 팔로워 천 명만 모아도 성공이다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많은 분들이 좋게 봐 주셨어요.
연재했던 내용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무엇인가요?
음, 제 울분에 못 이겨서 올린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는데요.
보호자를 바라볼 때, 환자를 위해 늘 희생하고 슬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친구들과 놀러 다니거나 조금이라도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픈 부모님을 두고 자식 혼자 놀러 다닌다느니, 살 만해 보인다느니 하는 비아냥을 들을 때가 있거든요.
그렇지만 저는 아픈 사람을 돌본다는 이유만으로 그 가족의 일상까지 아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보호자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연애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재미난 일이 있으면 웃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만화로 올린 적이 있는데 그때 개인 메시지를 많이 받았어요. 주변의 가시 돋친 이야기를 듣고 위축되었는데 대신 얘기해 줘서 감사하다는 분들,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돼서 좋았다는 분들이 많으셨어요.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이 비슷한 말을 듣고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때를 계기로 일종의 사명감이 생겼어요. 가족 중 환자가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처럼 일상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나쁜 게 아니라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 말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제가 모든 사람을 대변할 순 없다 해도, 긴 싸움을 하는 보호자 곁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책임감 갖고 전하고 싶어요. 대부분은 환자에게 집중하지, 환자 곁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으니까요. 우리도 똑같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림으로 쉽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멋져요 작가님. 다른 환자나 가족분들이 메시지도 많이 보내시는군요.
네. 저희 아버지와 같은 루게릭병이거나 비슷한 질환을 앓고 계신 독자들이 공감을 많이 보내 주시고, 질환이나 장애라는 소재 자체에 공감하는 분도 계세요.
종종 응원하는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분 중에 시간이 지나 부고를 전하는 분도 계신데요. 그런 경우에는 마음이 많이 아프죠.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을 제가 감히 다 헤아릴 순 없지만, 서로 격려하면서 마음을 나누곤 해요.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담아내고 싶은지, 작가님의 계획이 궁금해요.
엄청난 걸작이 아니더라도, 꾸준한 창작으로 세상의 시선이 닿기 어려운 곳에 빛을 비추고 싶어요. 제 콘텐츠가 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분들의 목소리를 더 많은 사람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 같아요.
그래서 올해는 전시 같은 오프라인 행사도 하고, 광고도 기부나 후원에 초점을 맞추려고 해요. 또 아버지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하려고 집필도 하고 있어요. 제가 창작한 오리지널 스토리로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있고요. 플랫폼에 의존하지 않고 저만의 경쟁력을 만들어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은선 작가님의 이야기, 어떠셨나요?
아버님이 확진을 받으시기까지의 과정, 주변의 시선 때문에 겪었던 어려움, 연재를 하시면서 독자와 소통하셨던 경험, 크리에이터로서의 포부까지 진솔하게 밝혀 주셨어요.
이 외에도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셔서, 작가님 이야기는 두 편으로 나누어 전해 드리려고 해요.
다음 편에서는 희귀질환 환자의 보호자로서 작가님이 다른 보호자 분들께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해 드리도록 할게요.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만나요!
- 박은선(긍씨) 작가님은요
- 〈평범해서 특별한, 긍씨의 글림일기〉라는 제목으로 인스타그램에서 활발한 연재를 하고 있는 크리에이터입니다. 인스타그램 외에도 전시회,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어요.